WASD Keyboards 커스텀 키캡 세트 후기

저는 세벌식 3-90 한글 자판 사용자입니다. 제가 두벌식을 사용하다가 세벌식을 사용하게 된 이후로 늘 아쉬워했던 것은 바로 세벌식 자판 배열이 각인된 기성품 키보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자판 배열을 손에 익혔기 때문에 두벌식 각인이 되어 있든, 영문 각인이 되어 있든, 키보드를 보지 않고도 원활하게 타자를 칠 수 있지만, 제가 사용하는 자판 배열이 각인된 키보드를 하나 쯤은 갖고 싶었습니다.

많고 많은 키보드 제조사 중에 세벌식 자판 배열이 각인된 키보드를 생산하는 업체가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세벌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겠지요. 게다가 세벌식 자판 배열은 두벌식과는 달리 국가 표준으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3-90”과 “3-91 최종”이 발표된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개량형 자판 배열들이 만들어져 공개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 보면 세벌식 자판 배열이 각인된 키보드를 양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러한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세벌식 3-90 자판 배열이 각인된 키캡 세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WASD Keyboards를 선택한 이유

일단은 국내에서도 무각 키캡 세트와 직접 그려서 만든 각인 도안을 준비해 가면 무각 키캡 위에 레이저로 각인을 해 주는 업체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하는 색상의 무각 키캡 세트를 구하는 것도 번거로웠고, 막상 레이저 각인을 해 주는 업체를 찾아보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한참을 더 찾아보던 와중에 예전에 소문으로 접한 적이 있는 WASD Keyboards라는 미국 업체가 떠올랐습니다.

WASD Keyboards에서는 이용자가 직접 디자인한 키캡 세트나 그러한 키캡 세트로 만든 완제품 키보드를 주로 판매하고 있는데요, 키캡 커스터마이징의 자유도가 상당히 높고 각인의 품질과 내구도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작하는 키캡은 Cherry MX 스위치와 호환되기 때문에 제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레오폴드 기계식 키보드에 장착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 배송에 소요되는 시간이나 배송비 등을 생각해 보면 국내에서 커스텀 키캡 세트를 제작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드는 것 같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만들어 보는 커스텀 키캡 세트라는 의미를 담아서 좀 더 유명하고 믿음직한 업체를 이용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커스텀 키캡 세트의 주문 과정

모든 주문 과정은 WASD Keyboards 웹 사이트 (https://www.wasdkeyboards.com) 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내비게이션 메뉴에서 [Shop → Keycaps → Full Keycap Sets]를 선택하면 주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문의 각 과정은 직관적인 UI로 이루어져 있고, 상세한 설명 텍스트와 지원 문서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스스로 주문을 넣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포스트에도 간략하게나마 기록을 해 보고자 합니다.

키보드 레이아웃 선택하기

상품 목록에서는 다양한 키보드 레이아웃을 위한 커스텀 키캡 세트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보통 국내에서 널리 쓰이는 키보드 중에서 숫자 패드가 있는 풀 사이즈 키보드는 104키, 숫자 패드가 없는 텐키리스 키보드는 87키입니다. 레이아웃 이름에 “ISO”가 들어있는 것들은 주로 유럽에서 사용되는 키보드를 위한 것이므로 키의 개수나 배치에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선택 시 주의해야 합니다.

키캡 색상 지정하기

상품 목록에서 원하는 키보드 레이아웃을 선택하고 나면 이제부터 재미있고 중요한 과정이 시작됩니다. 키캡 세트의 커스터마이징은 총 네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지는데요, 일단 맨 첫번째 “Keyboard” 단계에서는 선택한 키보드 레이아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올바른 레이아웃을 선택했다면 바로 “NEXT” 버튼을 눌러서 “Colors”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전체 또는 개별 키캡의 색을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Target”에서 키캡의 색을 바꿀 것인지, 키캡 각인의 색을 바꿀 것인지를 고르고, 그 오른쪽에 있는 21색 팔레트에서 색깔을 고른 뒤에, 중앙에 있는 키보드 이미지에서 색을 바꾸고자 하는 키캡을 클릭하면 클릭한 키캡의 색이 바뀌는 방식입니다. 모든 키캡의 색을 한꺼번에 바꾸고 싶다면 아래쪽에 있는 “Key Groups” 버튼을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키캡의 색을 지정했습니다.

키캡 각인 선택하기

그 다음 단계는 키캡 각인의 종류를 선택하는 단계입니다. 문자 및 숫자 키, F1~F12나 Ctrl, Alt, Shift 등의 기능 키, 그리고 Windows 로고 키 등의 모양을 제공되는 것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문자 및 숫자 키는 여러가지 언어나 자판 배치로 각인할 수 있는데, 두벌식 표준 한글 자판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의외였습니다. 각인 종류를 선택하고 나면 경우에 따라서 각인의 색상 설정이 초기화될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바로 전 단계로 돌아가서 각인의 색을 다시 지정해주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WASD Keyboards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각인 디자인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저처럼 직접 디자인한 도안으로 각인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직접 만든 디자인 파일을 업로드할 수도 있습니다.

커스텀 각인 디자인 만들기

커스텀 각인 디자인을 만들어서 업로드하기로 결정했다면 이 고객지원 문서를 자세히 읽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WASD Keyboards의 커스텀 키캡 각인을 위한 도안을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도안 템플릿 파일을 다운로드하기 위한 링크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운로드받은 도안 템플릿 파일에는 그래픽의 정밀한 배치를 도와주는 눈금과 벡터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기본적인 사용법, 그리고 기타 주의사항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또한 커스텀 키보드 디자이너 UI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기본 제공 키캡 도안도 각각의 레이어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대로 커스텀 도안에 가져다가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문 마무리

마지막 단계에서는 추가로 구매할 수 있는 부품 등을 선택할 수 있고, 키캡 디자인과 관련된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적어서 보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상품을 장바구니에 담고 체크아웃을 하면 주문이 완료됩니다. 직접 만든 커스텀 키캡 세트가 태평양을 건너서 집 앞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죠!

사용 후기

WASD Keyboards의 웹 사이트에는 커스텀 키캡 주문 제작에 2~5영업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적혀 있었는데, 제 경우에는 이틀만에 제작이 완료되어 바로 배송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금요일 오후에 배송이 시작되었는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에 바로 집 앞에서 물건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패키지 개봉

WASD Keyboards의 커스텀 키캡 세트는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흰색 작은 종이 상자에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지퍼백 안에 내용물이 들어있었습니다. 키캡 세트라면 키보드처럼 생긴 PET 재질의 트레이에 담겨서 올 줄 알았는데, 제 기대가 너무 컸을까요. 😅

큰 지퍼백에 담긴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 봤습니다. WASD Keyboards의 로고가 그려진 스티커가 한 장, 와이어 방식의 키캡 리무버 한 개, 그리고 다섯 개의 작은 지퍼백에 골고루 담겨 있는 키캡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제 이 키캡을 제가 가지고 있는 키보드에 한 번 끼워 볼까요!

커스텀 키캡 장착!

우선 다섯 개의 지퍼백에 들어있는 키캡들을 전부 꺼내 봤습니다. 키캡의 질감이나 색상은 합격점, 그리고 각인의 인쇄 품질은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곧바로 키보드에 있던 기존 키캡을 동봉된 키캡 리무버로 전부 제거하고, 새 키캡을 끼우기로 했습니다. 키캡을 하나씩 하나씩 빼는 동안 설레여서 어쩔 줄 몰랐어요. 키캡을 제거할 때는 새로운 키캡을 꽂을 때 참고하기 위해서 키보드상의 원래 위치에 맞게 가지런히 내려놓았습니다.

새로운 커스텀 키캡 세트를 키보드에 장착한 모습입니다. 제가 커스텀 키캡 디자인을 만들면서 의도했던 모습 그대로 나와 주어서 비주얼적으로는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평가 및 마무리

우선 WASD Keyboards 커스텀 키캡의 타건감은 좋은 편입니다. 사실 제가 오랫동안 싸구려 갈축 키보드를 쓰다가 무소음 적축 키보드로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깊이 있는 비교를 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키캡을 바꾸기 전과 비교해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키캡을 스위치에 끼울 때 다소 빡빡한 느낌이 있어서 키캡 하나를 끼울 때마다 여러번 힘을 주면서 눌러줬어야 했습니다. 주기적으로 키보드를 청소할 때마다 살짝 번거로울 것 같더라고요.

키캡 각인의 인쇄 품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 일단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반적인 인쇄 품질은 정말 깔끔하고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다만, 흰색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경우 완벽하게 깔끔한 것에 비해, 회색 등의 색이 들어간 부분은 흰색으로 칠한 다음에 그 위에 색을 덧씌우는지, 미세하게 흰 부분이 보였습니다. 물론 아래 사진처럼 키보드를 눈에 바짝 대고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굳이 한가지 흠을 잡자면, 모든 키캡의 한쪽 면에 꼬리가 잘린 듯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시다시피, 지저분한 흔적은 평소에 키보드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습니다. WASD Keyboards에서도 키캡을 제작할 때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만든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 문제는 그냥 없는 셈 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저의 첫 커스텀 키캡 세트는 대단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세벌식 3-90 자판 배열이 키캡에 그대로 각인된 키보드가 생겨서 기쁜 것은 덤이고요. 여러분도 시판되는 키보드가 없는 자판 배열을 사용 중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폰트나 디자인이 각인된 키보드를 갖고 싶으시다면 여러분만의 커스텀 키캡 세트 만들기에 한 번 도전해 보세요!

참고 사항

제가 만든 커스텀 키캡 각인의 도안은

다운로드하실 수 있습니다.

• 이 파일은 Inkscape용입니다. 다른 벡터 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으로 이 파일을 열 경우, 원활한 편집이 어려울 수 있으며, 다른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경우 WASD Keyboards의 디자이너들이 커스텀 디자인을 검토하는데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 WASD Keyboards에서 제시한 제한 사항 때문에 모든 텍스트 개체는 경로로 변환되어 있습니다. 이 도안을 만드는 데 사용한 글꼴은 다음과 같습니다.
  • IBM Plex Sans Condensed Medium Italic, 10pt (modifier 키)
  • IBM Plex Sans Medium, 12pt (영문 및 숫자 키)
  • IBM Plex Sans KR Medium, 12pt (한글 키)